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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계, 연공, 세대교체의 정치학

조형희 2022. 12. 16. 2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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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아시아적 맥락에서 1987~1997년의 정치는 세대교체의 정치학이다. 유교 사회는 나이와 연공으로 명령 계통상의 위계구조를 만든다. 10대에서 30대 까지는 조직의 바닥과 중간 사이에서 헤매는 시기이다. 여기서 눈에 뛰는 능력을 발휘한 40대에게 자신의 팀을 이끌 기회가 주어지고, 살아남은 자 들에게는 50대에 이르러서야 참모의 기회를, 50대 후반에서 60대 초반에는 조직의 수장이 될 기회를 준다. 마지막으로 조직 최 상부의 지도자급 인사들은 때 되면 물러나 준다. 이 피라미드는 위로 올라갈수록 자릿수가 줄어들지만, 위로 올라갈 기회가 공평하다면 아래의 다수는 이 지배구조를 받아들인다. 나에게도 매번, 매 단계 기회가 주어지기 때문에 그 확률이 맨 아래와 맨 위를 비교하면 대단히 작지만, 매 단계별로는 꽤 크다. 우리는 다음 단계로의 승진만을 생각하지 인생 전체에 걸친 확률을 생각하지 않는다. (뇌의 착각이라고 볼 수 도 있다. ) 1000명의 신입사원중 단 둘이 이사가 되는 경쟁이면 그 경쟁의 결과를 단 한번의 시험으로 결정지으면, 아마 상당수는 처음부터 참여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500대1의 경쟁이고 내가 그들이 될 확률은 너무나 작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1000명이 둘이되는 과정을 잘게 쪼개는 것이 관료제의 원리이다. 둘중 하나가 승진한다면 해볼만한 경쟁이다. 바로 한 단계 올라가는 경쟁이지만, 섬길 사람은 줄어들고 보상은 커지고, 부릴 사람은 많아지니 권력의 맞은 달콤하다. 고대부터 지금까지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 피라미드 구조 자체가 바뀐적은 없다.

  다만 다른사회와 달리 유교사회는 나이순의 룰을 대체로 지키려고 노력한다. 이 나이순 이라는 유교사회의 기본 원리는 시장원리와 충돌한다. 가장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팀을 리더해야 하건만,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이 리드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축구를 예로들면, 메시가 리드해야 하는 자리에 50~60대의 마라도나나 펠레가 주장자리를 궤차고 앉아 명령만 내리고 있는 구조인 것 이다. 따라서 능력있고 야망으로 가득찬 개인주의를 채득한 젊은이 에게 유교사회는 헬조선 일수 밖에 없다. 개인의 능력과 아이디어를 찾아내 보상하려는 자유주의적 시장기제는 이 유교사회의 연공 문화를 깨뜨리고자 한다.

  하지만 동아시아 위계구조가 그렇게 호락호락 하지는 않다. 근대를 관통하며 그것에 기;반을 둔 조직문화가 살아남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유교식 연공구조는 다수의 합의를 도출 해 내고, 조직을 안정시키며, 개인들을 집단적 목표로 이끄는데 다른어떤 조직 구조보다 탁월한 역할을 한다. 개인은 매몰되지만 집단이 사는 구조인 것이다. 한국, 일본, 대만의 잘 조직된 야구팀이 개개인의 기량이 훨씬 우수한 메이저리거들이 모인 미국팀을 종종 이기는 것은 바로 개인을 희생시켜 집단의 승리를 견인해 내는 동아시아 협업 시스탬의 산물이다. 개인은 숨이 막힐지언정 집단은 생존하는 집단의 구조, 그것이 벼농사 생산 체제에서 진화하여 20세기 산업자본주의까지 수천년에 걸쳐 이어져온 동아시아 특유의 협업 양식이다. 산업화 세대가 이 집단주의 위계의 문화를 경제발전을 위해 기업과 관료조직에 적용했다면, 386세대는 이를 민주주의 쟁취를 위해 학생운동과 시민단체에 적용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연공에 기반한 위계 구조가 항상 안정적인것만은 아니다. 유교사회 자체에 내장된 이 나이순의 룰을 어느 한 세대가 지키지 않는다고 가정해 보자. 예를들어, 맨 위에있는 최고령 지배 세대가 좀더 오래 그자리에 남아있고 싶어 할때 이다. 나가줘야 하는데, 나가지 않는 경우다. 어쩌면 모든 권력에 모든 권력자와 지배층에게 나타나는 공통 현상이라고 볼수 있다. 좀더 오래 해먹고 싶은 욕망, 인간이라면 어찌 없겠는가. 그런데 맨 위에있는 최고령 지배세대가 좀더 오래 남아서 권력을 더 많이 행사 할 수록 그 아랫세대의 인내심은 점점 임계치에 이르게 된다. 순환은 적체되고 기회는 공유되지 않으며 승진의 확률은 점점 낮아진다. 40대에 부장을 달았는데, 임원이 못되고 한 세대 전체가 그대로 은퇴하는 상황이 오는것이다.승진명단은 점점 짧아지고 인사발표일은 실망으로 가득차게 된다. 40대 차장 부장들이 켜켜히 쌓이면 30대 대리들은 무슨생각을 할까. 이 상황이 아주 오래 지속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 조직에 있어봐야 위로 올라갈 가능성은 없고 착취는 계속 될 것이고내개 돌아올 현재의 몫 뿐만 아니라 미래의 몫도 별볼일 없다면 인간은 미래를 할인한다. 남은 선택은 도박이다. 떠나거나, 아니면 저항 하거나.

  한국 현대사 에서 40대에 상승 사다리가 끊기자 조직을 뒤엎는 도박을 감행한 이들이 산업화 세대의 리더들이다. 박정희는 쿠테타로, 김대중, 김영삼은 40대 기수론 으로, 연공의 법칙을 깨 버렸다. 박정희의 쿠테타로 육사8기 위 기수들은 군 조직과 행정부 에서 사라졌으며, 김대중 김영삼의 40대 기수론 으로 한민당 시절부터 생존했던 민주당의 신구파 경쟁구도는 무너졌다. 아이러니 하게도 이 세 지도자들은 유교식 연공구조를 뒤엎었지만, 일단 자신들이 리더가 된 다음에는 측근에 의해 암살 당하거나 경제위기 주범으로 낙인 찍히거나, 자연 수명에 의해 물러 날때 까지 우두머리 권력을 놓지 않았다. 386세대 또한 1987년 민주화와 1997년 금융위기를 통해 권력의 세대교체를 이루었지만, 그다음 세대가 권력의 사다리에서 위로 올라갈 수 있는 통로와 가능성을 확보 하는데는 마찬가지로 실패했다. 왜 1987년의 민주화 효과는 다음세대로 그 과실을 넘겨주지 못했는가.

  몇가지가설을 세워보자. 첫째는 산업화 후기세대를 몰아낸 386세대는 앞선 세대가 보여준 장기집권욕을 그대로 이어받았다고 가정하는 것 이다. 이들은 민주주의를 활용하여 권력에 등극했지만 민주주의를 활용하여 권력에 더 오래남기로 작정했다. 포스트 386세대로서는, 마오를 몰아냈더니 푸틴, 혹은 시진핑이 나타난 형국이다. 386세대는 이전 세대와 달리 민주주의의 게임 원리를 받아들였으나, 이들의 권력욕은 이전 세대와 다를바 없다고 보는 것 이다.

  둘째는 포스트386세대의 약체론이다. 386세대가 민주화와 세계화를 주도하는 동안 아랫세대는 이들을 후배 혹은 부하로서 추종하며 따랏을 뿐 리더쉽을 직접 경험 해 볼 기회가 없었다. 386세대는 20대부터 학생회 및 학회 노동현장의 노동조합, 시민 사회단체의 연합 조직들을 자체적으로 동원하고 조직화 하며, 스스로 리더를 세우고 그 리더쉽의 자질을 배양하는 과정을 경험했다.기업의 386세대 또한 90년대 세계화의 물결속에서 해외 지사와 공장을 일구며 스스로를 볼모지의 리더로 세우는 경험을 했다. 30대 부터는 정치권 및 국가와 대결하며 교섭과 협상, 설득의 과정을 몸소 격으면서 리더쉽의 정의를 계속 업데이트 해왔다. 이와달리 포스트 386세대는 그 경험이 일천화일천하다. 심지어 40대가 되도록 386세대가 장악한 권력 네트워크의 주변부에 머물러 있을뿐 그 중심에 진입해 본적이 없다. 386세대가 40대부터 권력의 기예를 습득하며이를 공고화 하고 재창출하는 기술을 익힐동안 그 아랫세대는 허드랫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해본자가 계속 하는게 더 효율적 이라며쥐고 놔주지 않으니, 아랫사람으로서는 경험할 기회가 없었다.정치뿐만 아니라 기업조직 내부에서도 이러한 경험과 노하우의 세대독점이 일어났다.

  386세대가 국가, 기업, 시민사회를 가로질러 건설한 인적 네트워크는 한국 현대사에서 유래없는 견고한 것이 되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이 세대권력은 그 인전의 것과 어떻게 다른가. 그들은 유교 관료제의 원칙을 따를것인가. 민주주의의 원칙을 따를것인가. 아니면 둘다 따르지 않을것 인가.

  이 질문들에 답하려면, 1987년부터 시작된 정치적 민주주의만 봐서는 부족하다. 정치는 결국 분배의 문제로 귀착된다. 세대의 문제는 세대간 분배의 문제인 것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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