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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동시성의 동시성과 동시성의 비동시성

조형희 2022. 12. 29.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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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동시성의 동시성 이라는 개념이 있다. 근대화가 빠르게 일어난 사회, 따라잡기 근대화를 통해 근대화를 속도전으로 감행한 사회에서 전통과 근대, 탈근대의 현상이 동시적으로 관찰될때 이를 설명하기 위해 쓰는 표현이다. 한 회사 조직안에 전근대 농업사회의 가부장적 가족주의와 신분제 윤리를 온 몸에 새긴 1950년대생 사장, 미국식 개인주의와 자유주의 윤리가 더 편한 1990년대생 젊은 사원들이 공존하며 일으키는 충동과 갈등이 좋은 예 이다.

 

  비동시성의 동시성은 조직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개인의 마음에도 존재한다. 서구적 의미의 정치적 자유주의자인 1960년생 김모씨는 회사에서는 권위주의의 화신이다. 대학시절부터 단 한번도 반공 보수 권위주의 정치 세력에 표를 준적이 없지만, 회사에서는 엄격한 상명하복의 군대식 위계에 따라 팀을 운영하며 회사 밖에서는 향우회와 동문회 모임으로 휴대전화 스케쥴 앱이 꽉 차있다. 서구적 자유주의 정치 원리와 동양적 위계에 따른 인간관계의 윤리가 (그 비동시성으로 인해) 충돌할 만도 한데, 김모씨의 일상에서 두 원리는 동시적으로 공존한다.

 

  비동시성의 동시성은 공간에도 존재한다. 서촌과 익선동의 좁은 골목길을 채운 전통가옥과 그 사이를 비집고 생겨나는 이탈리아, 스페인 레스토랑과 수재맥주집 들은, 옛것과 새것의 이미지가 나란히 병렬되어 전통의 편안함과 이국적인 생소함을 동시적으로 재공한다. 비동시성의 동시성 공간은 아스라히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향수와 생전 격어보지 못했던것들에 대한 기대를 한 공간에서 동시에 체험 하도록 하므로서 장년과 청년이 한 공간에 머물게 해준다. 떡과 와인은 서촌에서 보완재가 되는 것이다.

 

  이와달리 동시성의 비동시성은 동일한 역사적 국면에 진입하는 상이한 주체들이 격게되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상이한 체험을 의미한다. 비동시성의 동시성이 각기 다른 속도로 생성되고 소멸되는 전근대와 근대 정체성 들의 기대하지 않은 공존에서 비롯된다면, 동시성의 비동시성은 서로 다른 연령대에 있는 동시대 개인들이 (동일한) 정치 경제적 격변의 사건들을 맞이하여 그 충격파를 각자 다른 기억으로 몸과 마음에 새기는 과정이다. 각기 다른 연령대의 주체들이 동시대에 생설하는 동상이몽인 것이다.

 

  공시성의 비동시성을 보여주는 유명한 예는 미국의 대공황기가 각기 다른 연령 집단에게 남긴 상이한 흔적 들 이다. 당시 유아기를 보낸 세대는 다른 연령 집단들에 비해 건강 및 신체 발달상의 거의 모든 지표에서 뒤처져 있으며, 이 차이는 평생 지속 되었다. 한국 전쟁기에 유아기를 보낸 한국전쟁 세대들(1940녀대 후반~1950년대 초반출생)이 이와 동일한 통계치를 보인다는 것은 그리 놀랄일이 아니다. 전쟁통에 배불리 먹으며 피난 다녔겠는가. 살아 남았으면 다행인 세대이다. 엄동설한 부산행 기차에서 젖먹이로 살아 남았던 이 세대와는 대조적으로, 한국전쟁기에 청년기를 보낸 이들은 (1925~1934년생) 전장에서 전우의 시체를 넘으며 피 흘링ㄴ 세대이다. 덧붙이며, 이 시기에 소년기를 보낸 이들은 (1930년대 중반~1940년대 초반 출생) 이들은 가장 예민한 때에 바로 윗세대 젊은이들과 장년층이 서로 죽고 죽이는 것을 목격한 세대이다. 상당수는 숨어서, 다른 상당수는 직접 소년병으로 참전하면서 말이다. 한국 산업화 세대의 원체험은 박정희의 영도 이전에 전쟁을 직접 격고 목격했다는데 있다. 한국전쟁을 유아기에 경험하며 전쟁의 흔적이 몸에 영양실조로 새겨저 있으나 기억에는 없는 한국전쟁 세대들과 동시대를 살았지만, 비동시적인 경험을 한 것이다.

 

  비동시성의 동시성이 사라지는 것들과 새로 생성되는 것들이 교차하는 운좋은(혹은 운나쁜) 스냅샷 이라면, 동시성의 비동시성은 역사라는 거대 격변을 우연히 공유한, 하지만 그 역사의 폭력에 속절없이 몸을 내맞긴 인간 군상들의 처절한 세대별 적응기이다. 비동시성의 동시성이  근대화 이론의  철학, 미학적 압축이라면, 동시성의 비동시성은 세대론의 클리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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