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 정체성과 도시화, 새마을운동
홍수처럼 도시로 몰려든 한국 농민공의 물결은 비동시성의 동시성을 각 농민공의 내면에, 그리고 농민공과 토박이를 뒤섞으면서 도시의 생태계 전체에 스며들게 했다. 한반도 각지에서 모여든 다른 말씨를 쓰는 농민공 들은, 똑같이 명동을 쇼핑하고 종로에서 해장국을 먹고 있다고 해서 종로나 명동 토박이의 정체성을 고유하지는 않는다. 이글의 기억은 유 소년기를 보낸 고향들녘에 고정되어 있으며, 논과 밭에서 체득한 협업과 경쟁의 버릇은 온 몸에 고스란히 각인되어 있다.
갑자기 서울과 부산, 인천 도시민의 다수가 되어버린 이 한국의 농민공 들은 도시로 이주하자마자 뿌리가 뽑힌 경험을 한다. 농촌의 씨족 공동체에서 친척과 이웃이 한데 어울려 서로 도와가며 벼농사 일을 해온 이 세대는 대이주가 가져온 고향의 상실과 낮선 도시의 환경이 강제하는 개별화, 개인화, 파편화라는 이중의 고통을 겪게 된다. 한 사회학자는 이러한 농촌출신 도시 이주민의 정체성 형성과정을 도시민으로서의 타지 화 라 칭한다. 농촌 정체성으로의 회귀를 꿈꾸면서, 동시에 도시민으로서의 자부심과 경제적 성취에 대한 의지가 혼돈스럽게 공존하는 경계인의 위치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세대의 다수는 이러한 홍돈과 경계의 삶을 극복하고 도시의 정주민으로 변신한다.
이들은 직장에서는 협력과 협업을 통해 조직을 건설하고 동네에서는 가족, 친지, 친구, 이웃과 교류하며 생존을 위한 정보 및 자원 동원 네트워크를 건설했다. 도시의 교회들은 이들이 비공식적 인간관계를 구축하고 자원을 동원하는 네트워크로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서울의 인구가 1960년 200만 명가량에서 80년대에 800만 명 그리고 90년대에 1000만 명을 돌파하며 급증하는 동안 기독교가 주장하는 교인의 수는 500만 명, 천주교가 주장하는 교인의 수는 350만 명 가까이 증가했다. 두 종교간 이동, 냉담 교인의 수, 교세 과시를 위한 과장 등을 고려하더라도, 서울인구 가운데 둘중 하나는 교회에 발을 들여놓은 적이 있다고 볼 수 있다. 함께 이주한 씨족 네트워크 동향 이웃과 농촌의 동창 네트워크가 이들의 1차적 사회 연결망이었다. 1930년대 출생 세대가 농촌에서 가져와 옮겨 심은 두레와 춤앗이 네트워크는 도시에서도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다고 봐야한다.
벼농사에 기원하는 1930년대 생들의 협업문화가 꽃을 피운 것은 아이러니 하게도 사무실과 공장에서였다. 이들은 논두렁과 밭두렁에서 협력하듯 긴밀하게 작업조직을 꾸렸다. 한 노동조합 지도자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공장)새마을 운동이 (경제발전의) 결정적 역할은 했어요. (작업장내) 단위마다 소그룹 토의조가 있었지요. 우리는 생산성을 향상시키기 위해 각자 의견을 내고 발언할 기회를 가졌어요. 우리 스스로 어떻게 하면 공정을 더 효율적으로 만들지 고민하고 비판 하면서 협력했어요.
귀를 의심했다. 한국 민주노조운동, 특히 그 전위 조직중 하나였던 전노협(전국노동조합협의회)을 일군, 노동해방 투사 가운데 손가락 안에 드는 지도자의 입에서 노동자들의 계급의식과 문화가 아닌 공장 새마을 운동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그 이야기를 하는 지도자는 어느덧 회상에 잠겨 있었다. 저임금과 착취에 저항하기 위해 노조를 조직하며 쫓겨 다니던 이야기가 작업조직에 대한 회상으로 바뀌어 있었다. 당시 비타협적 전투적 노동조합주의자 안에 숨어있는 작은 자부심을 보았다. 비록 유신정권의 노동탄압에 맞서 싸웠지만 공장안에서의 협력과 협업의 경험 자체는 다른 차원의 것, 즉 함께 어울려 일하며 조직과 공동체의 목표를 완수 했다는 세대의 의무완수에 대한 자부심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지도자의 회상은 한국의 고도성장과 관련한 또 다른 중요한 단서를 내포하고 있다. 박정희가 주도한 새마을운동 덕분에 이들이 효율적으로 협업할 수 있었는가, 아니면 효율적으로 협업 할 줄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새마을 운동이 성과를 거둔 것인가. 전자는 기존의 발전국가론 및 위대한 영도자론의 설명이고, 후지는 벼농사 체제론의 설명이다. 전자는 뛰어난 지도자의 영도력과 정책 덕에 가난과 무기력을 벗어던질 수 있었다는 것이고 후자는 그럴 저력과 능력이 있던 사람들이 때가되어 가난과 무기력에서 벗어났다는 것이다. 박정희와 박근혜의 새마을운동이 공장 노동자들에게 작업 공정을 더 효율적으로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주지는 않았다. 노동자들 스스로 밤새 협업하며 구르다 보니 캐우친 것이다. 이들은 인천에서ㅡ 울산에서, 창원에서 서구와 일본이 각각 200년, 100년에 걸쳐 조금씩 축적해온 기술들을 한 세대안에 응축시켜 이해했고, 이식했으며 개선했다. 어디서 이런 능력이 나왔는가. 박정희가 불어 넣어준 새마을정신이 만들었는가. 아니면 박정희 정부 관료들이 창안했다는 선별적 금융지원책이 만들어 냈는가.
1930년대생 들이 집단적으로 참여했던 농촌과 공장의 새마을 운동은 불과 7년만에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내고, 1979년 그 창안자와 함께 역사로 사라졌다. 여러 보수 계열의 연구자들은 이를 박정희의 타고난 영도력 덕분으로 기록한다. 특히 정부가 마을에 차별적인 등급을 부여함으로서 한국인들의 사회적 신분과 정치적 위신에 대한 문화적 DNA를 자극했고, 그를 통해 전국의 모든 마을과 사업장이 새로운 규범과 공공성을 획득하고 창안하는 단계로 올라 설수 있었다는 것이다.
유신의 교과서로 초등교육을 받은 이들은, 이 새마을 운동의 위상과 역할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때가 되었다. 어떻게 그토록 친족 집단 간의 불화, 반상의 갈등, 남녀 차별, 도박과 음주로 무기력 하게 찌들어 있었던 비자립적이고 무정형적이던 사회가 7년만에 모범적인 자립 자조형 마을과 공장으로 변신할 수 있는가. 한국경제사 라는 기념비 적인 저자를 남긴 이영훈 교수는 헨더슨의 소용돌이 정치라는 은유를 조금 변형시켜 나선 사회라는 개념으로 이 퍼즐을 설명 하려고 한다. 고도성장을 지휘한 박정희 대통령은 마치 잘 알고 있었던 양 능숙하게 나선 사회의 짜임새와 친화적 개발 정책을 추구하였다. 이는 한국사회를 중앙집권 체제에 순응적이며 자체동력과 자발성이 없는 비루한 신분 사회로 격하 시킨 후 능력있는 지도자와 테크노크라트의 영도력을 격상시키는 설명이다. 1930년대 혹은 그 직후 출생 세대 학자들은 이 퍼즐을 풀 수 없었다. 동아시아 사회에 깊숙이 뿌리박혀 있는 벼농사 체제와 그로부터 유래하는 사회적 협업의 하부구조를 저 평가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