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생을 좀더 역사화 해보자. 앞서 이야기한 농촌 공동체 경험에서 비롯된 협업 네트워크와 한국 전쟁을 통해 습득한 생존주의만이 이들의 아비투스를 구성하는 것은 아니다. 역사가 그렇듯, 출생 세대도 얕은 사건사에 대비되는 심층의 깊은구조로서의 경험을 구축한다. 트로이트와 발달 심리학자들의 연구를 따라, 이 깊은 구조로서의 경험은 어린시절에 형성되어 생애 전체에 걸쳐 변하지 않는 틀로 자리잡는다고 가정해 보자. 이들이 어린시절에 겪은, 다른세대와 구별되는 원체험으로서의 경험은 제국신민 교육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들은 오늘날 살아있는 세대들중 거의 유일하게 한자와 일본어를 모두 읽고 쓸수 있는 세대이다. 이들중 생존주의의 촉수가 예민하게 발달한 교육받은 소수는 영어를 최초를 집단적으로 습득했다. 언어에 대한 감각이 무뎌지기 전에 미 군정이 시작되면서, 생존과 출새의 도구가 일본어에서 영어로 바뀐 탓이다. 이들중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자 들은 한국전쟁 이후 출세가도를 달리게 된다.
일제에 의해 도입된 보통교육이 당시의 모든 국민에게 일반화 된것은 아니었다. 일본은 만주사변에서 중일전쟁으로, 그리고 태평양 전쟁으로 전선을 확대 하면서 군인과 물자부족에 시달렸다.1937년을 기점으로 조선에 대한 일본의 교육정책은 본토에서 이주해온 일본인과 조선인을 제도적으로 차별하는 두 국민정책 에서 조선인을 일본인과 동일화 하는 내선일체 혹은 황국 신민화 정책으로 바뀌었다. 조선의 젊은이들을 황군으로 키우려면 일본 젊은이와 동일한 말과 정신체계로 무장화 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이 필요에 따라 일제는 1938년부터 조선의 시골 면 단위까지 보통교육을 확장하며 교육 인프라 건설 및 학급수 증대, 교사 추가양성 및 파견작업에 돌입한다. 집에서는 우리말을 쓰면서 학교에서는 일본말을 쓰도록 강요 받으며 일본식으로 사고하고 훈련받은 세대가 길러진 것이다.
이 교육 체계는 일본의 패망과 함께 1945년 종언을 고한다. 하지만 햇수로 8년에 달하는 이 역사적 제도의 실험은 일제하의 초,중등 보통교육에 노출된 세대를 길러낸다. 7!9세에 초등교육을 받기 시작했음을 고려하면, 1920년대 말~1930년대 말까지의 출생자가 이 세대에 해당된다. 도회지에서는 사실상 취학 연령에 도달한 거의 전부, 농촌에서는 적어도 절반이상의 어린이들과 소년 소녀들이 이 교육에 노출되었다. 세대의 다수가 이중언어 구사자가 되었을 뿐 더러 일제가 메이지유신 이래 천황을 정점으로 구축해온 사회 유기체적 국가의 세포로서 조선의 민중이 동원되기 시작한 것이다. 1930년대생의 특이성은 이 동원과 일체화의 경험에서 비롯된다. 이들중 누구도 궁극적으로 황군이 된 사람은 없다. 실제 태평양전쟁에 동원된 것은 이전 세대인 1910년대생 및 1920년대생 들이었고, 1930년대생 들은 가장 나이가 많은 경우라도 중등학교를 다니며 해방을 맞이했다. 하지만 이들의 몸과 기억에는 이 일제식 보통교육의 흔적이 남아있다. 이 교육의 제도적 효과는 무엇이었을까.
제도에는 그 설계자의 꿈이 각인되기 마련이다. 일본은 근대 교육제도를 설계한 후쿠자와 유키치 같은 메이지 시대 지식인들과 기타 잇키 같은 군국주의 지식인들의 꿈은 무엇이었을까. 한마디로 요약하면 서구 따라잡기 였다. 미국의 흑선에 의해 강제로 개항을 맞은 후 일본 앨리트 들의 근대는 서구를 극복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메이지 이후 근대 일본의 지식인들은 조든 일본인을, 정확히 말하면 일본의 농민들을 근대 제국의 노동자와 군인으로 재탄생 시키고자 했다. 근대교육의 목표는 지위관의 신호에 정확히 반응하며 한눈파는 개인에 의한 다른동작과 해태가 방견되지 않는, 즉 모든 개개인이 거대한 유기체의 일부로서 정확히 움직이며 주어진 목표를 달성하는 일사분란하게 똑같은 호홉과 리듬을 반복하는 동일화된 신체를 주조해 내는 것이었다. 이들은 전쟁터에서 제대로 훈련받지 않은 혹은 급조된 조선과 중국 그리고 러시아 봉건 전제왕조의 군대들을 차례로 격파 했으며, 공장에서는 불량률이 극도로 낮은 공산품들을 만들어 냈다. 1930년대 후반 일제 치하 조선에 이식된 학교들도 정확하게 동일한 목표, 일사분란하게 조직의 목표를 향해 움직이는 동일화 된 신체를 공유했다.
도대체 왜 1930년대 날 ~ 1940년대 중반 일제 치하에서 유소년기를 보낸 1930년대생 들이 받은 교육이, 그 경험이 문제가 되는가. 저는 이 일제의 유산이 동일한 시기에 황군의 장교였던 박정희의 수출지향형 산업화 전력에 동원되어 60년대 이후 한국 근대화의 초석이 되었다는 식의 뻔한 근대화론을 펴려는 것이 아니다. 저는 이 일제식 교육에 대한 짧은 경험이 다른세대와 차별되는 그 세대만의 자원이자, 자본이 되었을 가능성에 주목한다. 이 세대의 독특한 자원은 그들만의 생존투쟁을 위한 자양분이자 자산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일제식 항국신민 교육의 경험만이 이 세대의 독특한 문화자본인가. 그렇지 않다. 이 세대는, 제가 이야기 할 동아시아 벼농사 체계에서 유래하는 농촌의 협업 네트워크의 자본 또한 몸에 지닌 마지막 농촌 세대이기도 하다.